크레마디카키는 최고급 피스타치오로 만든 카키색의 스프레드입니다. 빵이 주식도 아니고 ‘딸기잼’이 가장 익숙한 사람들에겐 좀 생소한 아이템이죠. 패키지도 ‘이거 먹는 게 맞나?’ 싶을 정도로 특이합니다. 거친 색감과는 사뭇 다른 달콤하고 부드러운 맛에도 놀랐고요.
대체 여긴 뭐하는 곳인가 궁금해져 웹사이트를 둘러본 순간, 이런 소개글을 발견했습니다. ‘평범한 일을 특별하게 하자’라는 슬로건의 디자인 그룹. 음식이든 디자인이든, 범상치 않은 것만은 확실했어요. 크레마디카키의 이야기가 궁금해졌습니다.
김봉주, 서경대 안녕하세요. 저희는 ‘디자인 그루뽀(Designe Gruppo)'라는 이름의 디자인 팀입니다. ‘평범한 일을 특별하게 하자’라는 슬로건으로, 식품으로 시작해서 패션, 라이프스타일까지 창의적인 제품을 만들고 공유하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있습니다. 크레마디카키(crema di cachi, CDC)는 저희 팀이 선보인 첫 번째 제품이에요.
서경대 ‘이게 뭐지? 누가 이런 걸 만들지?’ 궁금하게 만들고 싶었어요. 저는 원래 패션 디자인을 전공했고 이탈리아에서 7년 정도 살았거든요. 그때 피스타치오 스프레드라는 걸 처음 먹어봤어요.
저는 미식가도 아니고, 뭘 먹어도 크게 감흥이 없는 편이에요. 그런데도 그때 맛본 스프레드가 너무 맛있는 거예요. ‘나중에 내가 브랜드를 만들면 꼭 이 제품을 하고 싶다’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요. 그때는 막연한 생각이었는데, 몇 년 뒤 김봉주 대표와 함께 브랜드를 만들면서 그 생각을 실현하게 된 거죠.
김봉주 저는 미국 유학 후 금융 분야에서 일하다가 사업에 관심이 생겼어요. 우연히 서경대 대표를 만났는데 패션 취향이나 내가 좋아하는 일에 투자하고 싶다는 가치관이 굉장히 비슷했어요.
서경대 제가 하고 싶은 것을 하기 위해 이탈리아까지 갈 정도로, 어떻게 보면 저는 좀 무모하게 꿈을 좇으며 살았거든요.김봉주 대표도 계속해서 새로운 일에 도전해 왔고요. 같이 멋있는 걸 해볼 수 있겠다 싶었죠.
서경대 1~2년 전만 해도 한국에 피스타치오 스프레드라는 제품이 아예 없었어요. 그런데 조금 지나니까 백화점 식품관 같은 데서 한두 개씩 비슷한 제품이 보이는 거예요. 소비자들의 취향이 다양해지면서 한국의 그로서리 문화가 빠르게 발달하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일본에서는 1년 전부터 이미 대중적인 아이템이었고, 한국에도 곧 붐이 올 거라는 확신이 있었던 것 같아요.
김봉주 처음에는 이탈리아에서 상품을 수입하려고 했었어요. 그런데 수입이 까다롭더라고요. 한국에 없는 식품이다 보니 공식 수입 절차를 위해서 연구 논문이나 보고서를 하나하나 증빙해야 했어요. 그럴 바엔 차라리 직접 만들어 보자, 마음먹게 된 거죠.
김봉주, 서경대 아마 이렇게 어려운 줄 알았다면 안 했을 것 같습니다. (웃음) 제품 개발만 1년 반 넘게 걸린 것 같아요.
우선 저희가 원했던 맛과 컬러를 구현하는 것부터 오래 걸렸어요. 원래 피스타치오는 로스팅하면 카키색이 아니라 갈색이거든요. 카키 색상을 내려면 뭔가를 첨가해야 하는데, 적절한 색과 향을 찾기 위해 시금치, 페스토… 온갖 재료를 다 써봤죠. 그렇게 찾은 게 천연 색소 '치자'였어요.
점성과 식감도 중요했어요. 원재료의 함량을 늘릴수록 견과류 특유의 텁텁함이 느껴질 수밖에 없거든요. 저희는 함량 비율을 다르게 해서 수십 가지 버전을 테스트해 보고, 최대한 부드럽게 느껴지는 비율을 찾았어요. 식감도 식감이지만, 스프레드의 활용도를 높이고 싶었어요. 빵이나 크래커에 발라 먹는 것 외에도 아이스크림에 얹어서 먹거나, 따뜻한 우유에 넣어 피스타치오 라떼로 즐길 수 있도록요. 한두 번 발라 먹고 마는 게 아니라 다양한 방식으로 즐길 수 있기를 바랐습니다.
김봉주 맞아요. 청정 지역이고 HACCP 인증을 받을 수 있는 곳, 그리고 최고급 품종으로 불리는 ‘브론테 피스타치오’를 다루는 공장을 찾았더니 제주였죠.
사실 공장을 찾는 것도 정말 힘들었습니다. 작은 신생 브랜드고 아이템 자체도 비주류이다 보니, ‘왜 이런 걸 만드냐'면서 거절하는 곳도 많았어요. 운 좋게도 저희의 모든 기준에 부합하는 셰프님이 계셨고, 설득 끝에 시작해 볼 수 있었습니다. 셰프님 입장에서도 해보지 않았던 제품에 도전하는 거잖아요. 다행히 열정적인 분을 만나 두터운 신뢰 관계를 쌓을 수 있었어요.
김봉주 그냥 일반적인 잼처럼 보이면 절대 성공할 수 없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컨셉을 ‘화장품’으로 잡았습니다. 현재 패키지가 튜브 형태와 유리병, 2종인데요. 이 용기도 다 저희가 직접 만든 거예요.
김봉주 여기에도 또 많은 히스토리가 있는데요. 원래 처음에 생각했던 건 알루미늄 튜브 패키지였어요. 실제로 화장품에 많이 쓰이는 재질이거든요. 그런데 한국에서 제작하는 식품은 알루미늄 튜브 용기를 쓸 수가 없더라고요. 그래서 최대한 비슷하게 구현할 수 있는 재질을 찾다가 알루미늄과 플라스틱의 중간 정도인 ‘라미네이트’라는 재질을 선택하게 됐어요.
그런데 이런 특이한 용기를 만들고 보니, 이번엔 ‘충진’(용기에 제품을 채우는 것)을 해주는 곳이 없는 거예요. 저희는 몇만 개씩 대량으로 발주를 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잖아요. 대구 변두리에 있는 공장까지 가서 제발 해달라고 1박 2일 동안 빌었던 것 같아요. (웃음)
유리병도 쉽지 않았죠. 이 뚜껑이 호두나무를 깎아서 만든 건데요. 국내 규정상 나무가 식품에 닿으면 안 된다는 거예요. 게다가 외국에서 제작했는데 수입할 때 병 따로, 뚜껑 따로 허가받아야 하더라고요. 절차가 엄청나게 까다로운데 저희가 너무 아무것도 모르고 덤빈 거죠. 패키지도 승인받는 데만 거의 6개월이 걸렸습니다.
서경대 그만두고 싶을 때가 수도 없이 많았어요. 근데 일단 제품의 맛이나 안정성 같은 기본적인 부분들은 포기할 수 없었어요. 옷이나 다른 아이템과는 다르게 식품은 먹었을 때 안전해야 하잖아요. 타협이 안 되는 부분인 거죠.
제품 퀄리티가 어느 정도 완성된 다음 디자인과 패키지를 고민했습니다. 제품이 좋으니까 포장은 그냥 시중에 있는 걸로 해도 되지 않을까 생각하기도 했었어요. 근데 저희는 정말 아무것도 없는 작은 브랜드잖아요. 뭐라도 남들과 다른 게 있어야겠더라고요. 돈을 많이 투자해서 마케팅을 하고 이럴 수 있는 게 아니니까. 일단 패키지가 눈에 띄면 식품 코너나 매장에서 우연히 봤을 때도 ‘저게 뭐지?’ 궁금증을 불러 일으킬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김봉주 요즘은 재미가 없으면, 자극적이지 않으면 관심을 끌기가 정말 힘들잖아요. 저희는 뭔가 재밌으면서도 건강한 자극을 주고 싶었던 것 같아요.
김봉주 솔직히 말씀드리면, 첫날은 그냥 정신없었고 아무 느낌이 안 들었습니다… 오히려 실감이 났던 건 온라인에서 첫 주문이 있었을 때, 그리고 팝업 스토어에 참가하면서 실제로 고객분들을 만났을 때였어요. 그때는 정말 ‘아 재밌다. 이거 하길 잘했다’ 생각했던 것 같아요.
김봉주 일단 이게 뭐냐, 화장품이냐 식품이냐, 이건 거의 모든 분이 물어보고요. 무턱대고 손에 바르려는 분들도 계세요. 진짜 바르시기 직전까지 저희가 일부러 말을 안 하기도 합니다. (웃음) 그렇게 자연스럽게 대화가 시작돼요.
서경대 저는 제품 만들 때 고생했던 게 오히려 고객들과 대화할 때 도움이 됐어요. 저희가 말을 너무 술술 잘하는 거예요. 그냥 사실대로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는데도, 그 자체가 재미있는 스토리가 돼버린 거죠. 다른 (그로서리) 상품들은 대부분 외국에서 수입한 거라서 특별한 이야깃거리가 없어요. 근데 저희는 하나부터 열까지 일이 너무 많았잖아요. 저희 제품은 맛도 디자인도 뭔가 다르다는 게 느껴지니까 고객분들이 많이 좋아해 주시더라고요.
서경대 요즘 플랫폼들은 대부분 매입을 하지 않는 데다가 수수료가 있어서 여러모로 부담이 큰 편이에요. 굳이 저희 컨셉과 맞지 않는 플랫폼에 수수료까지 내면서 입점할 필요가 있을까 싶더라고요. 그래서 공식 웹사이트 외 채널 판매는 신중하게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오프라인도 마찬가지고요. 콧대가 높아 보일 수도 있지만 처음이니까 최대한 하고 싶은 대로 해봐야죠. 안 되면 나중에는 눈을 낮춰야겠지만요.
김봉주 초기에 브랜드가 추구하는 바를 가장 잘 드러낼 수 있는 공간이니까요. 저희가 여러 가지 서비스를 다 써봤는데요. 외주를 맡기지 않고도 어느 정도 원하는 퀄리티의 디자인을 만들 수 있고, 거기에 결제 기능까지 잘 되어있는 서비스가 아임웹이었어요. 이건 정말 진심입니다. (웃음)
서경대 브랜드는 일관성이 전부잖아요. 그렇게 공들여서 멋진 제품과 패키지를 만들어 놓고 갑자기 판매는 스마트스토어로 해버리면 뭔가 결이 안 맞는 거예요. 그래서 저희랑 잘 어울리는 웹사이트를 만드는 게 중요했어요.
서경대 이게 결국 다 연결이 되는데요. 남들이 쉽게 따라 할 수 없는 제품을 만들었다는 확신이 있기 때문인 것 같아요. 둘이 갖은 고생을 했는데, 아무리 봐도 이런 제품은 우리밖에 없거든요.
저도 이전에 패션 사업을 해보니까 남들이 따라 하기 쉬우면 조급해져요. 그럼 계속 새로운 걸 해야 하고, 하고 싶지 않은 것도 하게 돼요. 그런 게 결국 브랜드를 오래 가지 못하게 만들더라고요.
물론 나중에 잘 되면 다른 곳에서 어떻게든 따라 하겠죠. 근데 저희처럼 1년 넘게 시간을 쏟아서 제품을 개발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거예요. 저희가 해보니까 돈이 많다고 해서 이런 걸 만들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센스가 엄청 뛰어나다고 해서 만들 수 있는 것도 아니더라고요. 저희 둘이 가치관도 잘 맞고, 각자의 역할이 분명하고… 이런 부분들이 다 잘 맞아떨어졌기 때문에 해낼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그런 점에서 쉽게 따라잡히지 않을 거라는 여유가 있는 거죠.
김봉주 식품이기 때문에 결국 오프라인 경험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단독 팝업 스토어를 준비하고 있고, 내년에는 오프라인 매장을 여는 것도 생각하고 있어요. 그런데 요즘 팝업 스토어가 너무 많잖아요. 성수만 봐도 팝업 스토어가 수백 개, 수천 개인데 그 사이에서 어떻게 이목을 끌 수 있을지가 고민이에요.
제품 자체는 자신이 있거든요. 하지만 팝업 스토어에 가면 사람들이 (제품 말고도) 기대하는 것들이 있잖아요. 선물을 잔뜩 받아서 나오기도 하고, 재미있는 이벤트 같은 것들도 많이 있고요. 우리는 남들과 좀 다르게 하겠다는 모토가 있지만, 사람들이 원하는 것도 무시할 수는 없으니까요. 대중적인 트렌드와 우리만의 스타일 사이에서 어떻게 접점을 찾을까가 고민입니다.
서경대 사실 저희는 되게 단순해요. ‘멋진 사람들이 만드는 멋진 브랜드’로 생각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김봉주 제가 생각하는 ‘멋짐'이란 디테일이에요. 아주 평범할 수 있는 것도 조금 다르게 보여줄 때, ‘한 끗’이 다를 때 멋짐이 드러난다고 생각해요.
그걸 느꼈던 사례가 있어요. 한 번은 외부 전문가에게 비싼 돈을 주고 제품 촬영을 맡겼는데 결국 한 장도 쓰지 못했어요. 실력은 정말 훌륭하시지만, 그분은 일반적인 잼만 찍어본 거예요. 저희의 컨셉을 이해하고 그 결을 맞추기가 쉽지 않은 거죠. 사진, 패키지, 웹사이트, 판매 채널 다 마찬가지예요. 저희는 저희 제품이 특별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다음 일들도 그냥 평범하게 하고 싶지 않아요. ‘우리가 이걸 왜 이렇게 만들었지?’ 를 계속 생각하다 보면 ‘한 끗’이 달라지는 거죠.
서경대 식품 다음으로 패션, 라이프스타일까지 여러 가지 굿즈를 준비하고 있어요. 일상에서 우리가 마주하는 평범한 것들을 멋지게 제안하고 싶습니다. 유럽이나 가까운 일본만 봐도 멋있는 제품들이 참 많거든요. 국내에서도 충분히 멋있는 걸 만들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습니다.
김봉주 좀 더 현실적으로는, 준비 중인 단독 팝업 스토어를 잘 마치고 싶어요. 많은 분이 방문해 주시고 제품이 많이 팔리면 더 좋겠지만, 일단 오시는 분들이 ‘여기 재밌다, 궁금하다'라고 느끼실 수 있도록 잘 준비하려고 합니다. 올해 가을쯤이 될 것 같은데요. 혹시 관심 있으시면 꼭 한 번 방문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