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없는 이들에게 보내는 이야기 - 출판사 무제 | Peel the brand
2025. 04. 30
2025. 04. 30
배우 고민시, 김도훈, 염정아가 참여하고, 소설가 김금희가 쓰고, 배우 박정민이 기획한 작품. 영화나 드라마가 아니라 소설 <첫 여름, 완주>의 이야기입니다. 보통 오디오북은 종이책이 먼저 나오고, 그 내용을 그대로 녹음한 형태로 만들어져요. 그런데 이 소설은 처음부터 오디오북을 염두에 두고 반 희곡 형태로 쓰였습니다. 녹음에는 영화 캐스팅 라인업이라고 해도 손색 없는 훌륭한 배우들이 참여했고요.
어디서도 볼 수 없었던 이 책을 만든 곳은 바로 배우 박정민의 출판사, 무제입니다. 배우가 만든 이 출판사는 어떻게 이런 독특한 책을 선보이게 되었을까요? 오늘의 Peel the Brand, 무제의 박정민 대표를 만나봅니다.
영상을 보고 감상평 댓글을 남겨주시면,
신간 <첫 여름, 완주>를 보내드립니다.
'출판사 대표 박정민'
이 표현이 많은 분들께 조금 색다르게 느껴질 것 같습니다. 영화 <파수꾼>부터 <동주>,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 <전, 란>, <하얼빈> 등 다양한 작품으로 많은 사랑을 받은 배우 박정민은 사실 2016년 <쓸 만한 인간>이라는 에세이를 출간한 작가이기도 합니다. 2013년부터 ‘언희’라는 필명으로 한 온라인 커뮤니티에 연재하던 글을 엮어 만든 책이었죠. 이후 책을 사랑하는 배우, 글 잘 쓰는 배우로 알려진 그는 에세이 <쓰고 싶다, 쓰고 싶지 않다> 공저로 참여하고, 문학동네 시인선 뉴스레터 ‘우리는 시를 사랑해’ 필진이 되는 등 책, 문학, 글과 관련된 다양한 활동을 이어왔습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었던 활동은 단연 책방 운영입니다. 2019년 4월, 박정민 대표는 ‘책과 밤’이라는 서점 겸 북카페를 열었습니다. 배우가 운영하는 공간으로서 주목받기보다 그가 재미있게 읽었던 책을 소개하고, 사람들이 늦은 밤에도 편하게 들를 수 있는 공간이 되길 바랐죠. 이후 책방은 ‘책과 밤, 낮’이라는 이름으로 규모를 확장하며 많은 사람들과 책을 나누는 공간으로 운영되었습니다. 아쉽게도 2021년 6월을 마지막으로 책방 운영은 종료되었지만, 그 경험은 출판사 무제를 만드는 일로 이어졌어요.
‘무제’라는 이름은 어떻게 나왔을까요. 뭔가 심오한 뜻이 있었을 것 같지만, 박정민 대표는 웃으며 솔직하게 털어놓습니다. 어느 날 바닥에 누워 ‘출판사 한 번 해볼까?’ 하다가 진짜 출판사를 만들어 버렸고, 이름 역시 어쩌다가 지었다고요.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 거기에 뜻을 담을 수 있을 것 같았죠.
박정민 대표는 책을 통해 우리 주변의 이름이 없는 것들, 즉 소외된 것들을 살펴보고 싶었습니다. 어쩌면 평소 가지고 있던 문제의식이 은연중에 반영된 것일지도 모르겠어요. 무제는 다른 무엇보다 ‘출판사가 가진 소신을 지키는 것’을 최우선으로 생각하기로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관여하는 영화와 달리, 책은 비교적 적은 이해관계 안에서 만들어지기에 그런 방향성이 가능했죠.
2020년, 무제는 동물권 에세이 <살리는 일>을 출간하면서 출판사로서 정식 행보를 시작했어요. 첫 책을 고민하고 있을 때, 평소 친구로 지내왔던 박소영 기자의 글을 모아서 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박소영 기자는 길고양이 급식소를 운영하며 동물들을 구조하는 일을 해왔는데, 박정민 대표가 보는 친구의 모습이 그 일을 시작하기 전과 후가 많이 달랐기 때문이에요. 이후 무제는 박소영 작가와 동생 박수영 작가와 함께 쓴 <자매 일기>까지 출간하며, 느리지만 꾸준히 사회의 가장자리에 놓인 이야기들에 귀 기울였습니다.
‘이름을 찾지 못해 '제목 없음'의 '무제'로 이름 지은 출판사의 첫 책이 박소영 작가인 것에 감사한다. 그녀로 인해 '무제'는 이 사회에서 소외된 무언가를 찾아내기 위해 꼼꼼히 눈을 돌릴 것이다.’
(박소영 <살리는 일>의 추천사, 박정민)
무제의 신간 <첫 여름, 완주>는 ‘듣는 소설’입니다. 오디오북이 아니라 굳이 ‘듣는 소설’이라는 표현을 쓴 이유는 기존 출판계와 독서 시장에서 소외된 시각 장애인들을 가장 우선시하여 만들어졌기 때문이에요. 박정민 대표가 시력을 잃은 아버지께 책을 선물할 방법을 고민하다가 기획하게 된 프로젝트였죠. 기존 출판 시스템에서는 종이책이 먼저 출간되고, 그 이후에야 점자 도서 또는 오디오북이 제작됩니다. 출판되는 모든 책이 시각 장애인용으로 변환되는 것도 아니고요.
무제는 이런 전통적인 출판 시스템을 뒤집어보기로 했습니다. 김금희 작가의 소설은 원고부터 오디오북을 염두에 두고 쓰였습니다. 오디오북은 고민시, 김도훈, 염정아, 최양락 등 여느 영화나 드라마 못지않은 배우들을 캐스팅했어요. 단순히 화제성 때문만은 아니었어요. 글을 소리 내 읽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듣는 것만으로도 생생히 그려지는 라디오 드라마 같은 경험을 주고 싶었습니다. 제작뿐만 아니라 유통도 순서를 바꿨습니다. 종이책보다 오디오북을 먼저 제작하고, 장애인 도서관을 통해 시각 장애인 분들에게 가장 처음으로 작품을 공개했어요.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은 (이번 Peel the Brand 영상에서 보시는 것처럼) 박정민 대표가 모두 직접 기획하고 조율했습니다.
무제의 ‘듣는 소설’ 프로젝트는 앞으로도 계속됩니다. ‘소외된 것을 위하여’라는 신념 아래, 우리 주변에 있지만 잘 보이지 않고 잘 들리지 않았던 존재들을 살피는 책을 꾸준히 만들 계획이라고 해요. 왜, 무엇 때문에 이렇게까지 할까, 잠깐 궁금해지기도 했는데요. 한 인터뷰를 통해 무제의 대답을 살짝 엿볼 수 있었습니다.
이름 없는 존재들에게 이름을 붙여주고, 그들의 이야기를 조심스레 꺼내어 놓는 것. 그것이 무제만의 위로의 방식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무제가 전하는 이야기들이 천천히, 오랫동안 세상에 닿기를 바라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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